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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읽는 집

제129회 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29회 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3. 18. 15:36


♪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프랑스 살람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의 질문은 이렇다.


  "어쩌다 아파트가 한국의 주된 주거양식이 되었나?"


  프랑스에서는 그렁떵성블 (...) 이라고 부르는 아파트 대단지가 우범지대 취급을 받는다고 하니, 저 질문은 왜 한국인들은 단체로 험한 곳에 몰려사는가 하는 궁금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연구 과정에서 인터뷰를 많이 했단다. 뭐 그런 걸 묻냐는 반응이 태반이었다고. 어떤이는 좁은 땅에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당연히 아파트가 필요하다 했다. 또다른 이는 아파트처럼 살기 편한 집이 어디있냐고, 아파트 생기기 전에 어땠는줄 아냐고 되물었다.


  저자의 결론은, 땅이 좁아 아파트가 필수라는 말, 아파트야말로 주거양식의 현대성을 체득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좁은 땅에 여러 사람 살려고 아파트를 지었다면 아파트가 많은 곳에는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는데 딱히 그렇지 않다고 한다(이렇게 딱잘라 말할 수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두번째 포인트가 더 흥미롭다. 사람들이 아파트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개 몇십년 전에 지어진 단독주택이나 한옥과 아파트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현대성은 후진국 시대, 가난한 시대를 상징하는 불편한 한옥과의 비교를 통해 정의된다. 30세 이상 성인의 대부분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자신들이 살았던 집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축하고', '열심히 일해야 했던', 희생과 발전의 시대를 회상한다. 이 말들은 수도 없이 반복됐다. 급성장을 경험한 사회의 특징인 새 것을 숭배하고 낡은 것을 배척하는 경향으로부터 생겨난 아파트에 결부된 표상은 이렇게 한옥이 상징하는 발전되기 이전의 생활방식을 하향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탄이 아니라 가스를 쓴다거나 부엌이 집안에 있다거나 화장실이 현대식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의 편리함은 아파트라서, 아파트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 기술이 좋아지고 그 기술을 집에 적용할만큼 경제 수준이 높아졌다고 봐야 한단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오늘날에는 단독주택도 아파트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주거양식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는 늘 대안을 찾는다. 세상이 완벽할 수가 없을 뿐더러 우리는 늘 더 나은 것을 찾고자 하니까.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숙고를 거쳐 그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그저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여러 대안 중의 하나가 선택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어쩌다보면 장단과 효과를 면밀히 살피기도 전에 그게 대세가 된다. 대세가 되고나면, 좋아서 대세가 된다기 보다는 대세이기 때문에 좋아지는 묘한 본말전도가 일어난다.


  아파트 뿐이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많은 것들은 대부분 작은 우연으로부터 그 지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전지구적인 질서로부터 우리 사회의 여러 제도와 문화로부터 내 개인의 사는 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그랬어야만 하는 것'은 없다. 봄바람 불고 미세먼지 가득한 어느날 띠로리 하며 운명과 같이 시작된 우리의 인연도 따져보면 운명의 데스티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가능성이 훤씬 크다.


  이게 줄레조가 한 말인지, 줄레조가 기어츠의 말을 인용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탕수육에 저작권이 있는 말인지 가물가물한데, <아파트 공화국>을 비롯한 사회연구의 가치는 '우문을 던지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같은 역할을 역사학에 부여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는 전복의 가능성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나 개시점에 필연이 아니었다고 하여 이제 와 손바닥 뒤집듯 마음 먹은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로의존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다. 좋아서 대세가 아니라 대세라서 좋은 현상도 이것 때문에 생긴다. '혁명'을 하면야 경로의존이고 나발이고 다 다시 시작하게 되겠지만... 잘 모르겠고, 전복의 가능성과 경로의존의 힘 사이에서 조금씩 개선의 여지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나 싶다.


  『아파트 공화국』은 이미 너무나 유명한 책이라 읽기 전에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여튼 뭐... 아파트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이제는 혁명도 이민도 포기한 입장에서 꼭 한번 읽어야 하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라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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