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역사책 읽는 집

제20회 적군파, 교양인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20회 적군파, 교양인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7. 7. 09:13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1. 적군파 이야기,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습니다. 늦겨울이라지만 아직 봄을 바라기에는 너무 이른 날이었던 1972년 2월 19일 나가노현 아사마산장에 5명의 괴한들이 들이닥칩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초췌한 몰골의 괴한들은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농성을 시작합니다. 자신들을 ‘연합적군파’라고 밝힌 그들은 1천여명에 달하는 경찰들과 대치한 채 10일간 경찰과 대치합니다. 진압 과정에서 1명의 민간인과 2명의 경찰이 사망했고, 당시 상황의 TV 생중계는 최고 89.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총기로 무장한 채 경찰력에 맞선 채 산장에서 농성을 벌이는 좌파 조직이라니 21세기가 되고도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관뚜껑 깨고 나온 마르크스∙엥겔스도 철 없는 짓이라고 혀를 끌끌 찰 노릇입니다. 텔아비브 공항 테러의 주인공인 오카모토 고조의 이야기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어디 이것도 역시 아사마산장 농성에 비하면 많이 약합니다. 89.7%라는 기네스북 수준의 시청률이 괜히 나왔을라구요.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검거자들을 취조하다보니 이들이 원래는 5명이 아니라 31명이었고, 이 중 12명을 나머지 19명이 때려죽였다는 충격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밝혀집니다.

 

2. 글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있을까요.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일어난 일이라니 소재는 자극적이고, 서로 죽고 죽이고 농성하는 진행 과정은 드라마틱하며, 혁명과 애욕과 살인으로 빚어진 결과는 선정적입니다. 여기에 좌파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사회의 거부감(혹은 피로누적?) 비슷한 것들까지 깔려 있습니다. 일본이라고 뭐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런 식의 가십성 기사들이 쓰나미처럼 넘쳐났겠죠. (솔직히 말하자면 '적군파'라는 이 책의 제목이나 디자인 등등,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아주 살짝은, 그런 섹시함의 덕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그런데 역시 뭐라도 좀 배운 사람들 눈에은 이 섹시한 사건도 달리 보인 모양입니다. 일본의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책 ‘윤리 21’의 초두에서 적군파 사건을 통해 '책임'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처럼,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도 적군파를 단지 섹시하고 자극적인 가십이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성찰의 거리를 던져주는 소재로 주목했습니다. '내부폭력의 사회심리학'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역시 적군파라는 이 자극적인 소재를, 단순한 가십이 아니라 폭력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유용한 텍스트로 독해하고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4-1. 적군파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었고, 적어도 그들 내부에서 그러한 논리는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 폭력의 피해자마저도 그에 동의하도록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근대 이후의 대중적 폭력 중에서 단지 광기나 비이성만으로 이뤄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를 그토록 참혹하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 종족이 훨씬 더 열등한 종족이라는 '과학적'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지식이 벨기에 식민권력이 창조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나치즘과 파시즘의 대량학살의 근저에는 골상학이나 우생학이 제공한 '합리적' 근거가 있었구요. 그 외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4-2. 스스로를 '합리'나 '과학', '진리', '상식', '보편' 등등의 수사로 과도하게 치장하는 이데올로기란, 확신에 가득찬 듯 하지만 동시에 폭력의 극치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이견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으니 그 자체로 오만할 뿐 아니라,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불합리'나 '거짓'으로 몰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합리'나 '거짓'에게 가해지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폭력적인 수단이라 하더라도 합법적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5. 또 하나의 작동 방식은 '소수자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정한 소수집단을 설정하고, 이들에게 집단의 모순과 폭력을 집중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화살을 돌리기에도 효과적일 뿐더러 집단 내부의 균질성을 지키기에도 좋습니다. 설정된 집단이 소수라 저항력도 작을테구요.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식의 '소수자 만들기'는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자, 비만인, 사회주의자 등이 대표적이겠네요. 단지 그 사회의 다수가 공유하는 정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탄압받고 백안시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그저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소수자 집단을 배타시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6. 자, 여기까지의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들입니다.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 누워서 떡 먹기 수준으로 쉬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책에서 읽는 역사 이야기를, (이 경우에는 적군파 이야기가 되겠죠) 단지 강건너 불구경 하는 식으로 남 얘기만으로 들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들과,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태도들이,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별 문제 안 되는 것 같지만, 혹여라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순간 피곤하게 사냐구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성찰들을 게을리한 결과가 바로 적군파의 참극 아니었던가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둥,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둥, 역사를 두고 하는 그 많은 수사들이 그저 멋있어 보이라고 하는 말들에 불과한건 아니겠지요.


- 탕수육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