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역사책 읽는 집

제127회 만들어진 고대, 삼인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27회 만들어진 고대, 삼인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2. 11. 11:54


♪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1.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위치는 좀 애매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에 대한 학문도 아니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에 당장 도움이 안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가끔은 역사(학)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볼 수 있는지 확신이 잘 안 서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수학의 역사가 있고, 경제학에는 경제학의 역사가 있죠. 음악에도 음악의 역사가 있고, 미술에도 미술의 역사가 있고... 그러면 그냥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사를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왜 굳이 ‘역사학’을 별도의 학문으로 독립시켜야 하는 걸까요.


2. 흔히들 ‘역사(학)’라고 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연구하고 더 많은 과거의 사실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간의 생각과 달리 역사(학)가 단지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학문에서 멈췄던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근대 이전의 역사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치를 위한 제왕학/정치철학의 일종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춘추’나 ‘사기’ 같은 역사책은 단지 과거의 사실을 정리한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 사실에 대한 적극적인 가치평가를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근대 이전 동양의 역사학에서 '정사(正史)’라는 개념이 가능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서양의 경우는 아래의 링크에 있는 설혜심 선생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캐스트] 소비의 문화사 - 그들은 왜 역사책을 읽었나


3-1.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역사(학)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요.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만들어진 이후 역사교육의 목표는 대체로 현존하는 국민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곤 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과 계층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기 위해서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으니까요. 한국사의 경우에는 (현재로부터 소급하자면) 조선, 고려, 삼국시대, 고조선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형성된 경로를 추적하곤 합니다.


3-2. 물론 이러한 과정을 싸그리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현재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과정을 복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역사교육의 목표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재의 결과를 설명하는 것과 현재의 결과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의 차이란 매우 작기 마련이거든요. 그렇다면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교육은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소재가 되곤 합니다.


3-3. 그런데, 그렇게 되는 순간, 역사(학)는 브레이크 망가진 기관차처럼 폭주합니다. 현재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과거의 사실들까지 역사(학)의 이름으로 현실에 소환되어서는 강력하게 현실을 규정하게 되거든요. 나치의 제노사이드에는 예수를 저주한 유대인들의 역사와 아리아인의 ‘생활공간’의 역사가 소환되었다는 사실, 이제는 굳이 재삼재사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2, 제3의 유대인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구요.


4. 현실의 욕망에 끼워맞춰진 역사는 무엇보다 그 자체로 거짓말입니다. 광개토왕비 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100여 년간의 연구사(와 저자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이 책의 제1부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이미 30년도 더 전에, 조목조목 논파당한 ‘비문조작설’이 지금 이순간에도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 방송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내보냈는지는, 이 책의 1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5-1. 여기서 다시 나치의 제노사이드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 조장은, 과연 독일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착취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치가 조장했던 혐오 분위기는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많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이나 집시, 동성애자들에게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정말로 그 문제에 책임을 져야 했던 권력자들은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고, 독일인들은 사회 문제를 진정으로 해소시키지 못하고 결국 소수자에 대한 폭력 행사로 당장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독일인의 단결을 강조한 나치의 캠페인은 기실 독일 내부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권력자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5-2. 더 넓은 영토, 더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은 곧 강력한 정치적 리더에 대한 지지와 타국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이기도 합니다. 히틀러가 그토록 손쉽게 일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히틀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카리스마적이고 독단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들이 유독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겨레] 이덕일 중심 ‘상고사 열풍’에 드리운 정치적 위험성


6. ‘만들어진 고대’라는 제목은 에릭 홉스봄의 저서인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온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어진’이라는 표현은 완전한 허구나 날조라는 정도의 소박한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는지를 질문하라는 뜻까지 포함되어 있겠죠. 한국의 노동운동과 상고사의 관련에 대한 노동운동사의 연구를 보면, 상고사에 대한 삐뚤어진 집착이 궁극적으로 과연 누구에게 이득인지, 조금 감이 잡히는 것도 같습니다. 아마도 그 ‘감’이, 우리가 사이비역사학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일 거구요.


ps. 방송에서 못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싶어서 키보드를 두드리기는 했습니다만, 과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덩어리가 큰 이야기다보니 변죽만 울리다가 끝나는 느낌입니다 ㅠ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