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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읽는 집

제126회 6월 항쟁, 돌베개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26회 6월 항쟁, 돌베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2. 11. 12:00



♪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1-1. 존 레이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영 낯설지만, 호주에서 검은 백조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 싶을 겁니다. 1790년 호주 대륙에서 검은색의 백조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존 레이섬이죠. 백조란 본디 하얀 색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검은 색의 백조라는게 있다고 하니,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영어에서 ‘black swan’은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정도의 관용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1-2. ‘black swan’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대충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정도가 될 것 같네요 ㅋㅋㅋ 그러고보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게 대체로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그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게 되고, 그게 다시 역사적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는 거죠.


2-1. 서중석이 쓴 ‘6월 항쟁’에 따르면, 1987년 새해에 불과 몇 달 뒤에 서슬퍼런 군부정권이 무너질 거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8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을 앞장 서서 주도했던 대학생들은 1986년 10월의 건대항쟁을 계기로 거의 궤멸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고, 재야의 민주화운동 세력 역시 86년의 5.3 인천사태를 계기로 코너에 몰려 있었구요.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했던 야당 역시 인천사태 이후 수세에 몰린 나머지 ‘이민우 구상’ 같은 똥볼을 차다가 결국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니 어쩌니 하면서 자중지란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박종철이 죽고 신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대학가의 민주화운동도 침체를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반면 전두환 정권에게는 호재가 연이었습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으로 전두환 정권은 전세계를 상대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고, 경제지표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60년의 4월 혁명에는 1958년의 경제위기가 앞서 있었고(물론 당시 상황을 반드시 경제위기로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분명히 있습니다) 1979년의 부마항쟁과 10.26에도 경제위기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던 것을 생각하면, 1987년의 전두환 정권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습니다.


2-2. 새해 벽두에 터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은’ 단순쇼크사로 발표하고, 불붙는 개헌 논의에 4.13 호헌조치를 내놓았으며, 백주대낮에 야당 지구당대회에 깡패들을 투입하여 난동을 피우게 하는 등의 짓거리들은 그만큼 전두환 정권의 자신감이 컸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1987년 봄까지, 한반도 남쪽에서 민주화란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3.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니, 그냥 일어난 정도가 아니라,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4.13 호헌조치 이후 종교계, 학계, 언론계를 중심으로 비판여론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5월 18일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의 사인이 쇼크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것입니다. 국본(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이 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 시위는 국본조차 예상하지 못한 정도로 격렬하고 광범위했습니다. 서울의 명동성당과 부산의 가톨릭회관에서 농성하던 보통의 시민들은 누구보다 견실하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고, 지도부의 ‘비폭력’ 원칙과 무관하게 정권의 경찰력과도 결연히 맞섰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시위가 벌어진 곳도 많았고, 경찰력을 마비시킬 정도의 격렬한 시위도 여러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1987년 새해벽두의 지리멸렬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아, 정말 역사라는 게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건 진주아재 이야기...(372쪽 참조)


이건 마산아재 이야기...(296쪽 참조)


*경남 지역의 6월 항쟁에 관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세요*

전국 놀라게 한 경상대생 고속도 가스차 탈취 시위

87년 6월 10일 경남엔 무슨 일이 있었나(2)


4-1. 1987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꼭 30년 뒤인 2017년에 우리가 겪었던 촛불시위의 그것과 무척 닮았습니다. 2007년 이후 끝 간 데 없이 마냥 후퇴하기만 하던 한국 정치였지만 기가 막힌 몇 가지 우연을 통해 권력의 속살이 고스란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작은 분노들이 모여 결국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렸던 우리의 경험 말입니다.


4-2. 이후의 모습도 꼭 닮았습니다.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개발독재로 짓눌렸던 경제적 민주주의가 (일정 정도) 획득되었고, 통일운동과 여성운동 등 각각의 작은 분야에서도 민주주의는 일보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의 촛불시위 이후 우리들 역시 페미니즘과 성평등을 고민하고 있고, 소득주도성장이니 보편복지니 하는 분배의 문제를 공부하게 되었으며, 그 외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안목도 얻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6월 항쟁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 책의 평가는 쉬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4-3. 물론 낙관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항쟁 이후 불과 몇 개월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이 된 이는 어이없게도 군부독재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노태우였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군부독재는 한참이나 더 존속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잔당들은 버젓이 현실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2017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도덕한 권력자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남긴 것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의 삶을 규정짓고 있으니까요.


5. ‘6월 항쟁’을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그리고 영화 ‘1987’을 보는 우리의 방식)이 단지 승리의 뿌듯함을 나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6월 항쟁이 성취한 것을 뿌듯하게 만끽하되 6월 항쟁이 실패했던 지점까지 냉정하게 복기해야만, 지금의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자양분도 함께 섭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뚝 잘라내어 그 단면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긴 맥락 속에서 호흡하며 현실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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