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역사책 읽는 집

제18회 정글만리, 해냄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8회 정글만리, 해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2. 20. 21:55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1-1. 몇 년 전에 '대륙시리즈'라는 것이 인터넷에 꽤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외국인인 우리의 눈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중국 관련 이미지들을 모아둔 것입니다. 단순히 재미있는 짤방 모음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중국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약간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이쯤 해서 다시 보는 대륙시리즈. '대륙의 모터쇼' 편.


1-2. 어쨌거나 저쨌거나 중국어도 전혀 할 줄 모르고 중국에는 가본 적도 없는 저(탕수육)에게, '대륙시리즈'에 얼마만큼의 과장과 편견이 녹아있는지를 논할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륙시리즈'라는 기묘한 이미지들이 대륙의 이미지로 그대로 통용된다는 사실이, 우리가 중국이라는 사회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1-3. 하지만 우리에게 중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의미는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코 적지 않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서로의 역사가 태동하던 시절부터 관련을 맺어왔고, 최근에는 대중무역액이 대미무역액과 대일무역액을 합친 것보다 더 커졌다고 하죠.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속도대로 중국이 성장하면 몇 년 내로 미국까지 추월할 거라는 예상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건 미래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건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1. "지금, 당신은 미래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라는 문장을 띠지에 떡 하니 박아놓은 '정글만리'가 쓰여진 목적도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중국의 부상이 과연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름지기 조정래 쯤 되는 대작가는 되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죠. 그가 그동안 쌓아온 소설세계의 깊이를 생각하면, 조정래의 정글만리는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꽤 신뢰감을 줍니다.


2-2. 하지만 겉표지에서 풍기는 신뢰감은, 겉표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좀 무너져도... 사서 양반, 힘을 내요.


3-1. 정글만리는 시종일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내달려 갑니다. 소설(예술)로서의 미학적 성취보다는 오로지 중국 사회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쏟아붓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소설의 외양을 가지고는 있지만, 애초부터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글만리는, 소설로서 가져야 할 미덕을 상당 부분 상실해 버립니다. 방송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문장이 어색하거나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고, 그 때문에 정글만리의 서사는 곳곳에서 삐걱거립니다.


3-2. 물론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만이 소설의 미덕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 역시 소설의 역할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제가 정글만리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정글만리가 말하고 있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나 정확하고 새로운가?"였고, 그에 대해 제가 얻은 해답은... 방송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


4. 이런 식으로 문제점을 늘어놓자면 이야기는 한없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反日'이라는 적개심에 기초한 싸구려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한국과 중국의 연대라든지, 읽는 이가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만드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캐릭터 구성 등등등, 방송에서 이야기했던 그런 허다한 문제들이 눈에 띕니다. 그러니까 결국 정글만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숱하게 보아왔던 그렇고 그런 중국 이야기들의 맥락에서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셈입니다. 아니, (좀 더 오버해서 말하자면) 중국 사회를 다룬 여느 다큐멘터리에서 보아왔던 이야기들을 3권짜리 책을 사서 판에 박힌 내러티브들까지 곁들여 가며 읽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 이런 느낌...?


5. 보여주는 정보가 별로 새롭지 않다는 것은, 정글만리의 관점이 지금까지의 중국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중국은 '대륙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별난 세상의 이미지와 인구 10억짜리의 거대한 미개척 시장(市場)의 이미지 사이를 오가는 진폭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정글만리에서 보여주는 중국 역시 그 진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글만리는 중국의 부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성찰하기보다는, 이 넓은 시장에서 어떤 요령을 부려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는 듯 합니다. (이런 시선들에서, 지난 수백년간 식민지를 찾아헤메던 제국 자본의 눈빛이 언뜻 겹쳐 보인다면... 그저 제가 과민한 탓이겠죠.)


6-1. 중국의 부상이 단지 어마어마한 시장 하나가 열린 것 정도의 의미에 불과한가요. 중국인과 중국사회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는 반드시 계산기가 따라붙어야만 하는 것인가요. 그런 점에서 역사학계 일각에서 진행 중인 중국(혹은 동아시아)론은, 중국론의 의미가 반드시 시장 개척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프랑크나 아리기에게 영감을 제공한 포머란츠는 오히려 이러한 중국 혹은 동아시아에 대한 친환경적 대안론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그는 스기하라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경제발전이 서로 다른 부존 자원 조건에서 서유럽의 기술을 이식하기 위해, 자원절약적이며 노동집약적인 독자적인 공업화전략을 선택한 결과였다는데 동의한다. 즉 전후의 "동아시아의 기적"은 이 동아시아형과 서양형의 융합, 즉 스기하라 식으로 말하자면 잡종적(hybrid) 경로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중국의 서부대개발을 사례로 들면서, 중국의 내륙부에 대한 발전전략은 오히려 본래의 동아시아형으로부터는 일탈이며, 생태환경 파괴적인 발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p. 177.) (ケネス·ポメランツ, 杉原薰·西村雄志 譯, 比較經濟史の再檢討一東アシア形發展經路の槪念的, 歷史的, 政策的含意, 社會經濟史學 68-6, 2003, pp. 24~26.)


  그런데 근대 공업에 대한 비판과 농업의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미래를 위해 아시아에게 거는 기대와 내용은 차이가 있다. 포머란츠는 스기하라와 마찬가지로 자원낭비적인 근대 자본주의 경제가 낳은 생태파괴를 비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미래의 대안으로 아시아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스기하라는 노동집약적 전통을 계승한 아시아의 잡종적 공업화가 유럽식 자원소모적 공업화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더욱 효율적이고 우세에 설 수 있었으며 그것이 일본과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상의 근원이라고 본다는 면에서, 자본주의를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 아리기는 중국의 향진공업이나 소유제 자체에도 제한을 두는 공산당 주도형 산업화에 관심을 두면서 아시아적 전통,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잡종형이 유럽식 공업화보다 우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아리기는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초극 가능성도 부정하지는 않으며, 미래생산방식의 대안인 동시에 자본주의 초극의 대안으로 아시아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p. 178~179.)


  캘리포니아 학파에서 글로벌 헤게모니論까지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 과정을 회고해보자면 새로운 세계사 연구는 현실에 깊이 영향 받으며 제기되어 또 다시 현실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인접 사회과학에 자양분을 주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회과학의 새로운 현상 해석은 일반인들이 오늘날과 근미래의 세계를 전망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새로운 세계사가 유교자본주의처럼 20세기 동아시아 및 중국 부상에 대한 사후적 해설일 수도 있다. 또 하마시타 다케시(濱下武志)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신 세계사가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비판하지만 미국학계가 아시아를 재평가하는 방으로 아메리카를 세계사의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한국학계에서는 스기하라 가오루와 같은 일본 내의 동아시아론이 다분히 일본 중심적이라고 의심한다. 아울러 캘리포니아 학파의 작업이 인도, 일본, 중국을 또 다른 중심으로 만들 수 있다거나, 프랑크와 아리기의 사례처럼 중국 중심주의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도 존재한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에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진 중국과 아시아를 보는 상반된 시각의 논쟁이 유럽 내부의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시각차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서구학계의 중국과 동아시아론 역시 서구 내부의 위기와 대안에 대한 논쟁에서 동원된 측면이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만, 여하튼 통섭의 시대에 새로운 세계사 해석은 역사학의 전문 연구 틀 안에만 머물지 않고 인접학문으로 현실로 뛰쳐나가고 있다. 역사는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pp. 180~181.)

* 이상의 인용문은 강진아,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 - 캘리포니아 학파에서 글로벌 헤게모니論까지」, 『역사와 경계』 80, 2011.에서 인용하였습니다.


6-2. (인용이 좀 길기도 하고, 앞뒤 맥락까지 다 잘라먹어서 다소 적절치 않은 인용 같기도 합니다;;;) 즉, 중국의 부상은 서구식 체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경제 체제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유용한 생각의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냥 쉽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수십년만에 서구의 물질적 성과를 단숨에 추월해버린 중국의 부상을 통해 우리에게는 서구의 세계관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즉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세계관을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입니다. (물론 그에 대한 호불호나 타당성 여부는 별개로 논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지난 한 해 동안 정글만리가 기록한 공전의 히트와 호평들이,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중국론의 수준을 보여주는 듯 해서 뒷맛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 탕수육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