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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읽는 집

제1회 끝나지 않은 20세기, 역사비평사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회 끝나지 않은 20세기, 역사비평사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5. 9. 12:25


♪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역사책 읽는 집'이라는 방송을 하는 얘네들은 왜 하필이면 '동아시아'를 들고 나온 것일까요. 솔까말 그 범위부터가 좀 이상합니다. 그냥 '한국'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으면, 우리보다 훨씬 잘 나가고 잘 사는 유럽이나 미국의 역사를 보는게 지금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닐까요. 아니 그게 아니면 앗싸리 '한국' 얘기만 해도 이빨 까기에 부족함이 없을텐데 왜 하필이면 '동아시아'일까요. 시간적 범위도 요상합니다. 누천년간 쌓아온 그 많은 이야기들을 홀랑 다 빼먹고 하필이면 최근 100여년간의 이야기만 말하겠다고 합니다. 뭔가 설득력 없고 어설프기까지 한 얘네들을 보면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갑툭튀, 이뭐병, 여병추...


  '끝나지 않은 20세기: 동아시아 역사 1894~ '라는 제목에는 꽤 많은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최대한 창의적으로 썰을 풀어보자면, 1894년의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어떤 질서 혹은 분위기 같은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것들이 형성되어온 시기가 바로 '20세기'라는 것이고, 바로 그것들이 지금의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 만만찮은 조건들이기도 하다라는 정도로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좀 과도하게 창의적인 해석인 것 같지만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썰을 푼 이유는, 우리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집중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20세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톺아보는 것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지금 발 디디고 있는 조건들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 수천년간의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 조건들의 압도다수는 최근 100여년간의 사건들이 빚어낸 것들입니다. 크게는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개개인의 의식세계까지 말이죠.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의 근현대를 톺아볼 필요는 적지 않습니다.


  동아시아를 역사의 중심에 두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서구'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그간 우리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파악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세계사의 하위 카테고리 정도로만 여겨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고 하였는지를 서술하기보다는, 세계를 주도하는 어떤 거대한 힘 같은 것이 동아시아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동아시아는 단지 그것에 피동적으로 반응하였다는 정도로 인식해왔다는 것이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현재의 우리의 선택에 유의미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만 자꾸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주어진 조건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 나갔다가는 거대한 동아시아론의 수준으로까지 이야기가 퍼져가니 일단은 여기서 이야기를 정리한 다음에...


  방송에서는 책을 동아시아 근현대를 정리하는 일종의 교과서 정도로만 소개했지만, 사실 책은 생각보다 이야기해볼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장기 20세기'라는 개념은 흥미롭습니다. 방송에서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게 될까봐 그냥 넘어갔지만요.


  익히 알려진대로,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1 대전의 발발로 시작하여 소련의 붕괴로 끝맺는 것으로 보고 '단기 20세기'라는 말을 썼습니다. 달력상의 20세기와는 별개로 역사적 시간으로서의 '20세기' 새로이 규정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자들은 동아시아 20세기의 시작을 청일전쟁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아직 이렇다할 종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기 20세기' 살고 있는 셈입니다.


  동아시아의 사건들을 중심에 놓고 역사적 시간을 구분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런 구분법이 무척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장기 20세기'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써먹던 '단기 20세기'라는 개념을 동아시아 버전으로 멋지게 비틀어서 되먹이는feedback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누가 지적한 것처럼 사실 서구의 개념이라는 것들은 동아시아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는 언제나 부적절하지만 불가피한inadequate and indispensable 것들입니다. 그러한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면 이런 식의 비틀기는 유쾌할 아니라 심지어 유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조기님의 경우에는 저와 약간 생각이 달랐습니다. 책이 여전히 서구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죠. 꽈배기처럼 비비 꼬건 비틀건 말건 결국 '장기 20세기'라는 패러디 자체는 서구의 개념 자체가 먼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단기 20세기'라는 원형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장기 20세기'라는 이형도 존재할 없었을테니까요.


  내용의 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아시아의 경험을 주요한 소재로 삼고는 있지만, 결국 책에서도 시대 구분의 중요한 준거가 되는 것은 '근대'입니다. 바로 '근대'라는 경험이 지극히도 서구적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죠. 결국 동아시아의 역사는 또다시 '근대'라는 외삽적 현상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했는가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 우리가 처음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던 바로 이야기로 돌아가버리는 것이죠.


  (제가 이해한대로 것이라 라조기님의 생각이 정확히 이것이었는지는 없지만) 이러한 문제제기는 꽤나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라조기님의 주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동일한 서술을 두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대립하는 셈임을 있습니다. 물론 자리에서 어느 쪽이 타당한지 결론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권의 책을 두고 옥신각신 하는 것도 아주 생산적이지는 않겠죠.


  다만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향후의 과제는 일치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서구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경험을 서술할 있을 것인가."


  어차피 방송이고 처음 읽은 책이고 처음 시작한 이야기니까 앞으로 풀어야할 숙제 하나를 발견한 정도로 마무리해도 같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이야기해야죠.


- 탕수육 (2013. 2. 22.)


믿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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