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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읽는 집

제13회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본문

못다한 이야기

제13회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6. 18:29



♪ 역사책 읽는 집 듣기 : 팟빵 ♪


1-1.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일곱 문의 도시 테베를 건설하였는가?"


1-2. 많은 역사학자들이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이 물음에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놨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중적인 응답은 '영웅'의 이름을 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자면, 테베의 창설자 카드무스를 비롯한 여러 왕이야 말로 일곱 문을 가진 도시를 만들어낸 주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서점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역사책들 대부분이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죠.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역사책일) '로마인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여러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어느 한 개인의 결단이나 변덕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다보니, 명확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밝혀내기가 까다롭거든요. 예컨대,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새끼라서"라고 답해버리면, 임진왜란을 둘러싼 많은 맥락들, 예컨대 전국시대를 거치며 비대해진 일본 무사계급의 동향이나 조선 사회의 장기 침체 등의 문제들은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요인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에서 생겨난 것이니까요.


물론 특출난 개인이 없는 건 아닙니다.


1-3. 그런 점에서 20세기 역사학 최대의 업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사'는 꽤 큰 설득력을 가집니다. 사회사는 역사를 단순한 정치체제의 변동 정도로 보는 인습적인 관점을 벗어나 역사학의 시야를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거대한 족적을 남긴 '영웅'이 아니라, 역사를 살다간 수많은 뭇사람들로부터 찾아냈다는 점에서 사회사의 시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1-4. 사회사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역사를 과학적이고 기계적으로 정형화시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지역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보편타당한 발전경로를 밟아간다고 본 점은 다르게 말하면, 인간 사이의 차별을 당연시하던 기존의 관점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열악하고 후진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던 (이른바) 제3세계 국가에게는, 지금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세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가 억압받는 자들의 이념적 무기가 되어온 것도 아마 이 때문이겠죠.


1-5.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계 내부에서 사회사의 관점으로도 '박식한 노동자'의 물음에 또렷한 대답을 들려줄 수 없다는 반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민족'이나 '계급' 처럼 획일화된 거대한 범주 역시 역사 속의 사람들 개개인이 살아갔던 삶의 결 하나하나를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구술사, 신문화사, 미시사, 일상사 등의 연구방법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역사책 읽는 집' 제13회가 다룬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 중에서도 '구술사'의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을 채택한 저술입니다.


2.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그러한 관점을 채택했을 때 우리는 어떤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그간 한국전쟁을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전쟁 혹은 미국과 소련의 열전(熱戰. 冷戰 말고.)의 축약버전이나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지주-소작인 관계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 정도로 이해왔습니다. 한국전쟁 와중의 민간인 학살 역시도 이러한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하지만 작은 마을들에 흩어져 살던 개개인의 눈으로 다시 본 한국전쟁의 모습은 투철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가 맞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을 뿐, 진짜 속살은 민촌(民村)과 반촌(班村)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집안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외부적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제 삶의 현장으로 도착했을 때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 형태를 결정지은 것은 결국 사람들 하나하나가 맺고 있던 관계들이었습니다.


이건 너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3. 저자는 다양한 사례 조사를 통해, '복합적 갈등구조론'을 조심스럽게 제안합니다. 무척이나 신중하게 제안하고 있기에 그 뜻을 함부로 재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한국전쟁의 근저에 깔려있는 갈등을 단 하나(의 주요한 것으)로 한정하던 기존의 관점을 비판하고, 각각의 생활 집단 속(간)에 있었던 다양한 갈등들을 볼 때 비로소 한국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이 밝혀진다는 주장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 하나하나의 의미에 주목한다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역시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이유로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4-1. 3.의 이야기는 역사학도에게 유의미한 통찰입니다만, 이 책이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에게 주는 성찰의 여지 역시 결코 작지 않습니다.


4-2. 역사를 운위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개인이란 한갓 무력하고 사소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마을로 간 한국전쟁'을 통해서 본 모습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황폐화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 간의 학살이 끔찍한 참극이 된 마을은 평소부터 갈등의 씨앗이 잠재된 곳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터진 한국전쟁이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린 격'으로 갈등을 폭발적으로 극대화시켜버린 것이죠. 반면 평소부터 양호한 관계를 가져왔고, 마을 간의 갈등도 원만하게 잘 다스려지고 있었던 마을에서는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비극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힘은 우리들 개개인에게 있는 셈입니다. 


4-3.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 몫의, 1인분만큼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1인분 속에서 인간의 행복과 절망, 희망과 좌절이 모두 결정됩니다.


덧붙임. 아래의 책과 영화를 '마을로 간 한국전쟁'과 나란히 보면 더 좋습니다.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윤택림, 2003.)


적과의 동침 (박건용, 2011.)


덧붙임2. 사실 이 글의 도입 부분은 한겨레21 2002년 3월 24일자에 실린 '테베의 건설자는 무명의 석공' 기사를 거의 그대로 베꼈음을 고백합니다. ㅠㅠ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18.html


- 탕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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